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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학연구센터 소식

[수원학세미나] 제4회 수원학 세미나 - 읍지와 자료로 본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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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8-11-13 16:56|조회수 :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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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회 수원학 세미나 개최

 

○ 주   제 : 읍지와 자료로 본 수원

○ 일   시 : 2018. 11. 12(월) 16:00 ~ 17:30

○ 장   소 : 수원시정연구원 제1강의실

○ 발표자 : 정해득 교수(한신대 한국사학과)

 

  정해득 교수는 읍지(邑誌)라는 문헌에 담긴 조선시대 수원이 모습에 다가갔다. 읍지란 지금의 시사(市史)와 같은 성격의 저술로 대체로 해당 군현의 수령을 중심으로 편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정교수가 다룬 수원읍지는 다음의 표와 같다.

 

  그는 『水原府邑誌』 ①의 편찬시기를 1785년경에 작성한 것으로 비정한다. 그 이유는 첫째, 현륭원의 천봉과 이읍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읍지에 수록된 수원부지도에 화산(花山) 아래에 부내와 향교 등 구읍치가 그대로 표기되어 있다. 셋째, 수원부 관직 가운데 중군(中軍)이 누락되어 있다. 중군은 1786년에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넷째, 읍지에 기재된 가장 후대의 사실은 「공해(公廨)」의 은약헌(隱若軒: 東軒)과 어목헌(御牧軒), 강무당(講武堂) 등에 "1785년 이복영(李復永)이 부사였을 당시 중건하였다." 라는 기록이다. 수원부사 이복영의 재임기간(1784년 ~ 1786년) 중 관아건물을 대대적으로 중건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상의 근거에 따라 수원부를 이건하기 이전의 읍지라는 점을 고중하였다. 그리하여 정조가 수원을 옮기기 전 수원의 모습을 파악하는 자료로『水原府邑誌』 ①을 주목할 필요가 있고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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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의 3대 사건으로 꼽는다면, 1)수원부의 이읍(移邑) 2)도호부(都護府)에서 유수부(留守府)로 승격 2)화성(華城) 축성 등을 들 수 있다고 정해득 교수는 주장했다. 그는 읍지 기록의 변화를 분석하면서 팔달산 기록의 변화를 주목하였다. 반계 유형원(1622~1673)은 팔달산 주변을 주목하여 수원읍의 읍치를 이곳으로 옮겨 축성하면 대번진(大藩鎭)을 이룰 것이라 주장하였다. 유형원은 '팔달산'이란 지명을 사용하지는 않고, 단지 '북평(北坪)'이라 지목하고 있다. 이는 17세기에는 팔달산 지명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이어 팔달산 지명과 관련된 기록을 검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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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사(學士) 이고(李皐)는 여주 사람이다. 관직은 집현전 제학에 이르렀다. 고려말의 정란(政亂)을 보고 광교산 남록의 탑산으로 물러났다.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보내 무슨 일을 하며 즐기는 지를 묻자, '집 뒤에 작은 산이 있는데 들판 가운데에 있어 사통팔달하니 (산 위에)올라가면 사방을 바라보는데 가리는 것이 없어 이를 가장 즐긴다'고 대답하였다. 대게 머물러 풍자하는 뜻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태조대왕 2년에 경기우도안렴사로 여러 번 징소(徵召)하였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태조께서 거쳐한 곳을 그려오게 명하여 열람하였다. 크게 '좋다'고 일컫고 나서 '팔달산'이라 명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기록이 읍지에 갑자기 등장하는 것에 의문을 던진다. 태조가 팔달산이라 명명하였다는 것은 팔달산의 유래가 오래되었음과 권위를 빌리는 것이다.

 

  정조는 1790년 2월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수원으로 행차하여 새로 지은 수원부 치소(治所)의 행궁(行宮)에 유숙(留宿)하였다. 정조의 입장에서 볼 때, 수원부 치소는 이제 단순한 지방 고을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정2품 이상의 대신이 임명되는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킨 뒤 국왕의 행차를 맞을 화성행궁은 조선후기 최대의 규모로 지어졌다. 또한 화성행궁을 보호하기 위해서 화성성역도 일으켰다. 이제 행궁을 감싸 안게 된 팔달산은 화성 성곽 가운데 가장 높고, 중요한 자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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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긍익의 『연려실(燃藜室記述)』 제1권 「태조조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의 '고려에 절개를 지킨 여러 신하' 항목에 위의 사실들이 거의 그대로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연려실기술』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고(李皐)는 본관이 여흥(驪興)이다. 공민왕 갑인(甲寅, 137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집현전 직제학으로 고려 말엽에 물러나 수원의 광교남쪽(塔山)에 살았다. 스스로 망천(忘川)이라 호를 지었으니, 세념(世念)을 잊는다는 뜻이었다.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소락(所樂)이 무엇인가 물으니 공이 자기가 사는 산천의 훌륭한 경치를 극구 칭찬하였는데, 그 말 가운데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막힌 데가 없다는 말이 있었다. 태조가 즉위하매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고, 안렴사(按廉使)로 제수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태조가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공이 거처한 곳을 그리게 하여 이것을 보고 이름을 '팔달산(八達山)'이라 지었다. 세종조에 석비(石碑)를 특별히 그 마을 입구에 세워 '고려효자한림학사이고(高麗孝子翰林學士李皐)의 비'라고 하였다. 조선에 벼슬하지 않은 여덟 사람의 학사를 세상에서 '팔학사(八學士)'라고 칭하는데, 공은 조견(趙狷)ㆍ이집(李集)과 함께 그 중의 삼학사(三學士)로서 서로 살던 곳이 가까워 떄때로 소를 타고 왕래하였다고 한다. 조견은 청계산(淸溪山)에 숨고 이집은 둔기리(遁機里)에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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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가 머물렀던 행궁이 팔달산 아래 자리 잡았고, 이긍익의 기술에서도 사실로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단순한 산 팔달산은 이제 유서 깊은 산으로 변신하였다. 어쨌든 팔달산과 관련된 이야기는 그렇게 정착되어 갔다. 1834년 편찬된 『화성지(華城誌)』부터 고적(古蹟) 조항으로 옮겨 기록되어 단순한 산(山)이 아닌 '유서 깊은 산'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1899년 편찬된 『수원부읍지』 고적조에는 1791년 읍지의 기록 가운데 풍수적 기록을 제외한 나머지 기록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한편 김정호의 편집으로 알려진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수원부 산수(山水) 항목에는 "팔달산은 부치(府治) 서쪽의 작은 산인데, 들판 가운데에서 특출하게 일어났다. 화성은 그 위에 연유하였다. 산 아래에 병풍바위와 약천(약수)이 있다" 고만 기록하였다. 팔달산의 지명 유래가 빠지고 팔달산 안의 병풍바위와 약천을 명승으로 거론한 것이다. 이제 팔달산의 유래는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는 확고부동의 사실로 굳어졌고 그 안에서 즐길만한 경치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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