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원학연구센터 소식

[수원학심포지엄] 제5회 수원학 심포지엄 개최

페이지 정보

작성일 : 2018-12-03 17:08|조회수 : 1,485

본문

일시 2018. 11. 29(목) 14:00 ~ 18:00
장소 수원화성박물관 영상교육실

제5회 수원학 심포지엄

  

 

○ 주  제 : 자료로 본 수원지역 3·1운동

○ 일  시 : 2018. 11. 29(목) 14:00 ~ 18:00

○ 장  소 : 수원화성박물관 영상교육실

○ 주요 참석자 

    - 발표자

       1) 박환 교수(수원대) "수원군 지역 3·1운동 - 사진자료 분석을 중심으로"

       2) 조성운 박사(동국대) "김선진 「일제의 학살 만행을 고발한다 - 제암, 고주리의 3·1운동」의 구술 기억과 실체"

       3) 성주현 교수(숭실대) "이변헌의 「삼일운동비사」로 보는 수원 3·1운동"

       4) 한동민 관장(수원화성박물관) "소설가 홍성원의 「먼동」을 통해 본 3·1운동 형상화와 수원지역"

    - 토론자

       1) 사회 : 조철행(독립기념관 연구원)

       2) 김승태(한국기독교연구소장), 이동근(수원시 3·1운동 기념사업 추진 TF팀장),

           박철하(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 조성면(수원문화재단 전통교육팀장)

IMG_3949-편집.jpg

IMG_3975-편집.jpg

IMG_3990-편집.jpg

IMG_4023-편집.jpg

IMG_4067-편집.jpg

IMG_4063-편집.jpg

IMG_4104-편집.jpg

IMG_4179-편집.jpg

IMG_4245-편집.jpg

IMG_4271-편집.jpg


○ 주요내용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수원시정연구원 수원학연구센터에서는 2019년에 앞서 수원지역의 3.1운동의 양상을 검토하고 뜻깊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기 위해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어떻게 3.1운동을 기억해야 할지 여러 방법이 가능하겠지만, 우리는 수원지역의 3.1운동이 각종 자료에서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그 기초를 다지는 일로부터 시작하기로 하였다. 사실(fact)을 탄탄하게 다지는 일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기본이되는 일이며, 더디지만 멀리 갈 수 있는 출발이기 때문이다.

 

  심포지엄의 발표자들이 채택한 자료는 1) 수원출신의 소설가 홍성원의 소설 『먼동』 2) 구술채록집인 김선진 『일제의 학살 만행을 고발한다』 3) 이병헌의 『3.1운동비사』 4) 사진 등이다.

 

발표자

발표 주제

토론자

한동민(수원화성박물관장)

홍성원의 소설 먼동을 통해 본 3.1운동 형상화와 수원지역

조성면(수원문화재단 전통교육팀장)

조성운(동국대 박사)

김선진 일제의 학살 만행을 고발한다의 구술 기억과 실체

이동근(수원시 31운동 기념사업 추진 T/F팀장)

성주현(숭실대 교수)

이병헌의 3.1운동비사로 보는 수원 3.1운동

박철하(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

박환(수원대 교수)

수원지역 3.1운동-사진분석을 중심으로-

김승태(한국기독교연구소장)

 


  홍성원(洪盛原, 1937~2008)은 우리의 근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구한말에서 한일합방을 거쳐 3.1운동에 이르는 시기는 우리 역사상 가장 참담하며 슬프고도 노여운 시대” 수원지역 최고의 문학으로 꼽히는 먼동은 이례적으로 3.1운동을 자신의 작품에서 배경으로 삼았다. 토론자 조성면이 말한대로 한국근대소설사에서 삼일운동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한국근대소설의 획기적 분기를 이루는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萬歲前)』은 글자 그대로 ‘3.1만세운동 이전’까지의 시기만을 배경으로 삼았을 뿐이다. 기월(其月)이 독립신문에 연재한 「피눈물」(1919), 최서해의 「고국」(1924), 이광수의 『유랑』(1927),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1953), 선우휘의 『불꽃』(1957) 정도이다.

  

  한동민은 홍성원이 자신을 수원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갖은 존재임을 고증하였고, 소설 먼동의 구성과 내용에 대해 분석했다. 그리고 소설속에서 3.1운동의 전개과정을 어떻게 형성화했는지 정리했다. 홍성원이 소설에서 형성화한 3.1운동의 모습은 사실은 아니지만, 작가로서 홍성원이 수원지역에서 성장하며 수원이라는 ‘장소’에서 느꼈던 정서와 당시 연구성과의 수준과 그것을 작가 자신이 섭렵한 방식 등을 이해하는데 관심을 갖고 고민할 만한 내용일 것이다.

진실은 과연 진실한가? 사실과 진실은 다를 수 있으며,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도 있고 또 여러 개의 진실들 가운데서 상황과 맥락에 맞게 진실들이 선택, 편집, 소비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홍성원의 소설에서 한번 고민해봐야 할 내용이다.

 

   조성운은 김선진의 『일제의 학살만행을 고발한다』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김선진은 1970년대 초반 당시 수원군 우정면 전교실에 출입한 천도교신자로 지역에 대한 애향심을 바탕으로 제암리와 고주리의 학살사건에 생존했던 당사자들의 구술을 정리했다. 구술의 학술적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을 때 그는 아들 손을 잡고 신념하나로 생존자를 한명씩 찾아가며 구술을 받아냈던 것이다. 기억이 역사일까? 구술이 역사라고 할 수 있을까? 기억에 바탕한 구술이 과연 역사를 재구성하는데 가치가 있을까? 이런 의문은 그의 책 부록에 나오는 기독교 측의 자료에 나타나는 내용과 사실상 일치했다. 특히 기독교 측의 자료는 3.1운동 당시의 선교사들의 기록이며, 일본측이 본국에 보고한 기록, 선교사들이 생존자로부터 들은 증언 기록이기 때문에 김선진의 작업은 더욱 가치가 입증되고 있다.

 

   성주현은 이병헌의 『3.1운동비사』를 다루었다. 이병헌의 기록은 실제로 수원 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을 기록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주목받은 문헌이다. 이병헌은 평택출신으로서 천도교 수원교구에서 활동했다. 『3.1운동비사』은 1959년 시사시보사에서 간행된 것으로 3.1운동을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일기, 민족대표 33인의 심문조서 그리고 각 지역의 3.1운동의 활동을 모아 출판한 것이다.

  

  수원지역의 3.1운동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월 1일 북문인 용두각(華虹門)에 수백 명이 모였는데, 경찰이 이곳에 무슨 일로 모였느냐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군중은 이리저리 피하는 척하다가 별안간 만세를 부르자 순사는 깜짝 놀라 경찰서로 달려가 버렸다. 만세소리를 듣고 각처에서 모여든 군중이 수천 명이었다.”

  

  “3월 16일 장날을 이용하여 남쪽으로부터 만세소리가 나더니 잠시 동안 천 여 명이 호응하여 八達山 西將臺와 東門 안 鍊武臺에 수백 명씩 모여 만세를 부르며 시가지 종로를 통과하여 대혼란을 이루던 중 경찰은 소방대와 헌병과 합동하여 이를 제지하느라고 힘을 다하였다. 주모자를 검거하자 시내는 전부 철시를 단행하고 인심이 더욱 진정되지 않음을 보고 경찰은 검거하였던 사람을 석방하였다.”

 

   “29일 오후 11시에 水原妓生組合 기생 일동이 그곳 慈惠醫院으로 검사(健康檢査)를 맞기 위하여 가다가 경찰서 앞에서 동 기생 중 金香花가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고 지휘 하에 일제히 만세를 부른 후 병원으로 가서 다시 독립만세를 불렸는데 병원에서는 검사할 것을 거절하여 기생들은 그대로 나오다가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각각 헤어졌다. 그 조합 취체역(取締役) 金香花는 곧 체포되어 공판에 회부된 바 六개월 징역의 처형을 받았다.”

 

   이러한 이병헌의 기록을 통해 수원지역의 3.1운동의 실상에 다가가는데 중요한 내용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토론을 맡은 박철하는 1919년 3월 1일 당시 수원에서의 3.1운동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즉 이병헌의 『3.1운동비사』의 내용이나 이제재의 『수원의 옛 문화』에 기술된 3월 1일 횃불만세시위는 더 많은 고증을 거쳐 공식화가 올바른 역사적 접근이라고 지적하고 언론에 의해 기정사실화하는 자세를 경계하였다. 사실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심포지엄의 관점과 일치하는 시각인 셈이다. 특히 그는 사건기록의 장소성에도 주목하여 수원경찰서와 자혜의원은 거의 같은 공간에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박환 교수는 3.1운동 관련 당시 사진자료의 신빙성과 정확성의 검증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였다.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石虎弼, 1889~1970)은 3.1운동 첫날부터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1919년 4월 15일에 일어난 제암리교회 방호 학살 사건 현장에도 직접 찾아가 제암리와 수촌리에서 있었던 일제의 만행에 관한 보고서도 남겼던 인물이다. 수촌리에서의 일제의 만행은 3월말 4월 초 수원지역 만세시위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이 4월 6일 새벽에 마을에 들와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불을 끄려는 사람들을 총칼로 제지하여 한 사람이 죽고 여러 사람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제암리는 발안 장날 만세시위에 대한 보복으로 4월 15일 오후 일본 군경이 마을에 들어가 15세 이상 남자를 예배당에 모으고, 총을 쏘고 불을 질러 마을 전체를 불태워 부녀자 2명을 포함한 23명을 학살하고 이웃 고주리에서 천도교인 6명을 더 총살한 사건이다.

  

  스코필드가 작성한 「제암리의 대학살(The Massacre of Chai-Amm-Ni)」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영자신문 『상하이 가제트(The Shanghai GaZette)』 1919년 5월 27일자에 서울 주재 익명의 특별통신원(Special Correspondent)이 4월 25일 보내온 기사로 실렸다. 같은 무렵 작성한 「수촌 만행 보고서(Report of the Su-chon Atrocities)」는 비밀리에 해외로 보내져 미국에서 발행되던 장로회 기관지 『Presbyterian Witness』 1919년7월 26일자에 실렸다.

 
  현재 수원의 3.1운동 피해 사진자료는 그 자료의 출처가 확실하게 고증되지 않은 상태에 놓여있다. 박환 교수는 독립신문, 독립기념과, 정한경(Henry Cheng)의 The case of korea, L`INDEPENDANCE De LA COREE ET LA PAIX(1919), 수형자카드 등 수원지역의 3.1운동 관련 사진자료를 유형별로 분류하고 그 출처를 고증하여 사진 자료가 갖는 생동감을 더욱 높히려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김승태 소장은 토론을 통해 구체성을 보완할 수 있도록 세세한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위로